중요 선사·역사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사적지 정비와 복원을 위한 보고서 및 연구성과를 제시하여 역사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개발이나 도굴 등으로 훼손, 멸실될 우려가 있는 유적과 민원 발생의 소지가 있는 긴급한 사안의 유적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외소재 우리역사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 민족 문화의 정체성 형성과정 및 교류양상을 밝히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발굴성과
- 01. 강화도 돈대(사적)
- 02. 강화도 고려왕릉(사적)
- 03. 개성 고려궁성유적 남북공동발굴조사
- 04. 경복궁 발굴조사
- 05. 고성 문암리(사적)
- 06. 나주 복암리 3호분(사적)
- 07. 나주 신촌리 9호분(사적)
- 08. 서울 올림픽미술관 및 조각공원부지 발굴조사
- 09. 숭례문 발굴조사
- 10. 아차산4보루 발굴조사
- 11. 양양 낙산사 발굴조사
- 12. 장도 청해진(사적)
- 13. 중부 서해 도서지역 학술발굴조사
- 14.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 15. 파주 금파리 구석기유적(사적)
- 16. 서울 풍납통 토성(사적)
- 17. 풍납동 197번지 발굴조사
- 18. 풍납동 410번지 발굴조사
- 19. 서울 풍납통 토성 주거지
- 20. 한 · 러 공동발굴조사
01. 강화도 돈대(사적)
조선시대 국방유적 강화도 돈대 국내 최초 발굴조사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북성리 산47번지 소재 '초루돈대'(樓墩墩臺)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초루돈대는 김포지역에 대한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현황조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강화도 일대에 잔존하는 돈대에 대한 축조 규모 등 보수 · 복원에 필요한 기초 자료가 부족하여 지난 11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36일간) 초루돈대를 발굴하였다. 이번 조사는 강화도 소재 돈대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로서 그간에 이루어진 돈대에 대한 조사 · 연구가 지표상에 드러나 있는 현황 조사에 치우쳐 왔던 단점을 보완하고 돈대 축조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초루돈대는 해발 45m의 낮은 언덕 위에 화강암을 다듬어 평면 계란형으로 쌓은 것으로서 남북 35m, 동서 27m 크기로 마치 돌로 쌓은 산성을 축소한 모양이다. 돈대에는 벽체를 따라 북쪽과 북서, 북동쪽에 포좌(砲座)가 있으며, 남쪽에는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돈대 바깥 벽면은 한 단의 기단석(基壇石) 위에 6∼8단 네모형의 화강암을 15㎝ 가량 들여 쌓고, 돈대 상면에는 할석(割石)을 3단으로 쌓고 흙과 강회를 섞어 마무리했다. 벽은 아랫단의 굴곡에 맞추어 돌을 다듬어 쌓는 정교함을 보인다. 조사 결과, 남벽과 북벽은 지표 아래 30∼40㎝ 아래에서 드러난 풍화암반층 위에 기단석을 설치하고 벽석을 쌓았으며, 원지반(풍화암반층) 경사가 급한 동벽과 서벽은 지형이 낮은 부분을 돌과 흙으로 보축한 후 벽석을 쌓았다. 바깥쪽 벽면을 지지하기 위한 내부시설은 바닥부터 머리 크기 할석을 벽석에 맞추어 위쪽으로 갈수록 좁혀 쌓고 벽면 5 · 6단 높이에서 2단으로 할석을 둘러 마무리하였다. 벽면과 보강석을 뒤채움하는 방식은 동 · 서벽이 차이를 보이는데, 동벽은 암반층 위에 적갈색 사질토, 숯이 많이 섞인 흑갈색 사질토, 뻘층, 점토층 등을 교대로 쌓아 뒤채웠고, 서벽은 보강석 위에 모래를 한 겹 깔고 그 위에는 점토와 굵은 모래흙을 교대로 다짐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바깥쪽 상면은 할석을 쌓아 마감하였고 안쪽은 전돌을 2∼3단 쌓고 틈새에 회색 강회를 발라 마무리했다. 돈대 외부 원지반이 낮아 흙으로 보축한 위에는 주먹만 한 산돌을 넓게 깔아 빗물 등으로 인한 유실을 방지하고 있다. 벽석에 비해 기단석을 내어쌓은 점과, 내부 뒤채움 방법 등은 조선시대 석성의 축조방식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돈대의 축조가 전통적인 석축성곽 축조기술의 전통 위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또한 문 서편 벽면에서 축조 시기(康熙五十九年四月日:1720년)와 관직명 등이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었다. 초루돈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는 강화도 소재 돈대 연구에 기초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현재 강화군이 추진중에 있는 돈대에 대한 보수 · 복원에 필요한 실질적인 자료를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성곽의 전개과정과 기술전통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02. 강화도 고려왕릉(사적)
강화도에는 왕릉 2기, 왕비릉 2기, 능내리석실분, 허유전 묘 등 고려시대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이 중 중요고분을 위주로 2001년 강화 석릉(碩陵), 2004년 강화 가릉(嘉陵) · 강화 곤릉(坤陵), 2006년 능내리석실분(陵內里石室墳) 등 총 4기를 발굴조사하였다.
이들 고분은 상당부분 공통된 특징을 갖추고 있어 강도(江都)시대 왕릉급 고분의 전형을 일부 파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공통된 특징으로는 모두 횡구식 석실분이며, 횡구부와 맞닿은 동 · 서벽의 끝단에 문주석을, 사이 바닥에는 문지방석을 설치하였고 판석 3매를 이용하여 천장석을 올리고 석실 양벽석의 최상단과 최하단에는 나무문을 달기 위한 문틀고정용으로 추정되는 방형의 홈을 만든 점이다. 또한 석실내부 바닥 중앙에 장방형의 관대를 설치하였고 천장(개석) 상부에는 8각 혹은 12각의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석실입구는 1매의 판석으로 막은 점도 공통되는 부분이다.
이 중 능내리석실분의 경우, 호석을 돌린 봉토와 그 바깥쪽을 돌리는 난간석, 난간지대석, 석수 2기와 이를 전체적으로 보호하는 구조물인 곡장(曲墻)이 확인되었는데 배치양상이 조성 당시 상태로 온전하게 남아있어 난간석과 관련구조물의 축조방법 및 봉분의 전체적인 형태를 복원할 수 있다.
강화 곤릉과 능내리석실분에서는 석실 전면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강화 곤릉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정면 3칸으로 이 건물의 중앙어칸을 따라 돌출된 부분이 이어지고 있어 '정자각(丁字閣)'으로 추정된다. 능내리석실분은 적심석이 정면 · 측면 각각 1칸씩 남아 있으며, 건물지 남쪽에는 축대가 노출되어 있고 축대 중앙에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강화 석릉, 강화 가릉, 강화 곤릉, 능내리석실분은 모두 몇차례 도굴되었으나 금속 · 옥장식품, 청자류, 기와류 등 다양한 유물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중요유물로는 능내리석실분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확인된 진단구(도기호), 강화 가릉 석실 내부 출토 100여점의 중국 당송대 동전과 옥장식품 등이 있으며, 강화 곤릉과 강화 석릉에서는 삼족향로(三足香爐)와 간결한 당초문(唐草文)을 역 상감(逆象嵌)한 병뚜껑 등 최상품의 청자가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강화 곤릉 및 능내리석실분 건물지에서는 귀목문 수막새 및 취두를 비롯한 다수의 기와류가 수습되었다.
유적전경
석실내부
방형홈
석실상부구조물
석실입구막음형태
석실 전면 건물지
03. 개성 고려궁성유적 남북공동발굴조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2007년부터 북측의 문화보존관리국 및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함께 개성 고려궁성(宮城)유적에 대하여 남북공동 발굴조사를 추진 중이다. 남과 북은 2007년 5월에서 11월 사이 120일에 걸쳐 궁성유적의 중심인 회경전(會慶殿 )영역의 서편구역 30,000㎡에 대한 시굴조사 및 일부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다음해인 2008년과 2010년 각각 50여일간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입지와 성격에 따라 각기 중심축을 달리하여 조성된 다수의 건물지가 드러나 회경전 서편구역의 건물배치양상을 확인 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亞'자형 건물지의 구조상 특징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사구역의 서북편에 위치한 정면 5칸 측면 3칸인 17호 건물지는 『고려사』에 기록된 태조(太祖)와 역대 왕들의 진영(眞影)이 봉안된 경령전(景靈殿)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 중 길이가 65cm인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통형 청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매우 특징적인 유물로 앞으로 다양한 연구가 기대된다. 그리고 암 · 수기와의 등문양에 인장이 찍힌 약 100여점에 달하는 인장와印章瓦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기와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후로 진행될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고려궁성 및 고려시대 도성제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다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04. 경복궁 발굴조사
태조4년(1395)에 창건된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변형 · 훼손되었다. 이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국가유산청에서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을 추진 중이다.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2004~2005년에는 경복궁 소주방지와 흥복전지, 함화당 · 집경당 행각지를 발굴하였고 2006~2010년에는 광화문지 및 월대, 궁장지, 용성문지, 협생문지 등 광화문권역을 발굴하였다. 2011년 이후에는 흥복전지에 대한 추가 발굴을 진행할 예정이다.
2004년에는 소주방지 및 복회당지를 조사하였다. 수라간이라고도 불리는 소주방은 궁궐 내 음식을 장만하는 공간으로, 발굴조사 결과 내소주방 · 외소주방 · 복회당이라는 세 개의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내소주방은 임금의 수라를 장만하던 곳이며, 외소주방은 차례나 잔치에 쓰이는 음식을, 복회당은 궁내의 음료와 다과 등 간식을 만들던 곳이다. 그밖에 건물을 짓기 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배수시설과 당시 사용했던 우물 등을 확인하였다.
2005년에는 흥복전지 및 함화당 · 집경당 행각지를 조사하였다. 흥복전지와 함화당 · 집경당은 주로 외국 사신들을 만나거나 내각회의를 열던 장소로, 발굴조사 결과 흥복전지와 그 부속 행각지 9동과 함화당 · 집경당 행각지 7동을 확인하였으며, 그 외에 고종연간 이전 건물지 5동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그 밖에 구들시설 13기, 문지 5기, 배수시설 12기, 배연시설 3기 및 담장지 2기를 확인하였다.
2006년에는 흥복전지 및 함화당 · 집경당 행각지 추가조사와 광화문 권역 일부 지역의 조사를 하였다. 흥복전지에서는 고려시대 추정 구(溝)유구를 추가로 확인하였고, 함화당 · 집경당 행각지에서는 담장지 2기, 집경당 남행각지, 선대건물지 등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광화문권역은 현 광화문의 동편 궁장의 북측 일부 구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건물지 1기와 적심석군, 구들시설 1기가 확인되었다.
2007년에는 광화문권역을 조사하였다. 먼저 궁장지 및 어구(홍예) 지역은 현재의 동십자각 인근지역으로, 경복궁 남편의 동 · 서 궁장지와 궐내의 물이 흘러나오는 어구가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는 동 · 서 궁장지와 수문(水門) 성격의 무지개문(홍예) 1기, 다리 1기를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광화문지 및 월대지역 발굴조사에서는 조선 후기 고종연간의 광화문지와 월대 · 궁장지를 비롯하여, 그 하층에서 조선 전기 태조연간의 광화문지 · 월대 · 궁장지도 확인하였다. 그 밖에 조선시대 건물지 2동을 비롯하여, 일제시대 전차선로 · 전신주 · 건물지 등도 확인하였다.
2008년도에는 광화문권역 내, 흥례문(興禮門) 동 · 서 회랑(回廊)에서 궁장지까지 남북으로 연결되는 담장지와 그 사이에 난 문지, 그리고 광화문 육축(陸築) 동쪽부터 동십자각(東十字閣)에 이르는 동편 궁장지(宮牆址) 지역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지표 아래 40cm에서 고종대의 담장지와 용성문지(用城門址) 및 협생문지(協生門址), 그 하부에서 선대(先代) 건물지 각 1동, 그리고 궁장지가 양호한 상태로 발굴하였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광화문 일대의 용성문, 협생문, 광화문 동편 궁장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특히 궁장은 그 기초부가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어 조선시대 궁장의 웅장했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선대 건물지가 확인되고 조선 전 · 후기 궁궐 건물의 공간 구성의 변화('낭(廊)에서 담장')가 확인되어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2009년도에는 광화문권역 내, 서편 궁장지, 영군직소 · 초관처소지를 발굴하였다. 「광화문 서편 궁장지 발굴조사」에서는 이 구간에서 확인된 어구의 위치를 통해 북궐도형의 기록이 방안도면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실과 함께 그동안 조선고적도보를 통해서만 추정해 온 서십자각의 위치가 '서십자각 표지석'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그림 자료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어구의 형태, 규모를 밝히고 궁장 내부에서 외부로 흐르는 어구의 변화 양상을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영군직소 · 초관처소지 발굴조사」에서는 교란으로 인해 경복궁 복원을 위한 고증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유구들이 발굴을 통해 계속해서 확인되는 점, 그리고 선대유구가 경복궁 거의 전역에 걸쳐서 남아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것은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향후 경복궁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2010년도에는 서수문장청 지역, 어도, 광화문 동 · 서 궁장 남편 지역을 비롯하여 동수문장청, 군사방, 용성문 · 협생문 북편 담장지, 어도 북편의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서수문장청 지역에서는 조선후기 건물지 3기, 광화문 동 · 서 궁장 남편 지역에서는 일제 강점기 전차 선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동수문장청, 군사방, 용성문 협생문 북편 담장지, 북편 어도 등은 교란으로 인해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 지역은 교란이 심해서 건물지가 거의 확인되지 않았으나 일제 강점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차 선로의 역사와 축조 방식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전차 선로 및 침목에 대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광화문 서편 궁장 남편 지역에서는 침목 상면의 선로까지 확인되는 등 전차선로가 거의 완형에 가까운 상태로 확인되어 근대유물로서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2012년부터는「경복궁 흥복전 권역 복원계획」에 따라 흥복전 본채와 그 주변 행각의 미발굴된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에서는 흥복전 외곽의 부속 행각지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왜식정원이 조성되면서 북행각, 중행각, 회광당, 창차비 등 많은 건물지가 훼손되었으나 사료와 도설에 설명된 건물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담장 11기, 협문지 5기, 벽체시설 13기, 구들시설 6기, 부속시설 2기, 계단시설 3기, 배수시설 7기 등의 부속시설물도 확인하였다. 흥복전 건물의 좌향은 계좌정향이고, 건물지 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고적도보」에 표현되어 있는 건물지의 형태와 비슷하며, 각 건물들의 용도에 따른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건물지 분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적심은 세장방형이고 건물에 따라 팔각방형의 형태를 하는 등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시기상으로는 모두 고종 연간에 중건된 문헌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05. 고성 문암리(사적)
남한 최북단에서 한반도 最古 신석기인의 자취 발견
강원도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은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구릉지대의 남쪽사면 사구(沙丘)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발굴조사는 1998년부터 현재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1·2차(1998년·2002년)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집자리와 매장유구, 야외노지 등 15기의 유구와 함께 다종다양한 신석기시대 토기 및 석제품 등 1,0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그 연구성과와 중요성이 인정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암리 선사유적일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장으로의 활용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다. 2010년의 발굴에서는 집자리 1기, 야외노지 2기의 유구와 함께 서해안식 침문계토기가 수습되었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의 유구와 출토유물로 볼때 국내 최고의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져 있는 양양 오산리 유적(B.C. 6000∼3000)과 연대가 비슷하다. 한편 최하층에서 발견된 유구는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 동북지방과 중국의 동북 3성, 러시아 아무르강 연안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문화와 한반도 선사인의 원류 및 이동경로, 당시의 문화계통과 전파과정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06. 나주 복암리 3호분(사적)
영산강유역 “아파트형고분”의 실체
나주 복암리 3호분은 영산강 중류의 다시면 복암리 들판에 자리 잡고 있는 평지성고분이다. 원래 7기가 분포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이 일대를 ‘칠조산(七造山)’이라고 불려 왔으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4기의 고분은 분구의 형태가 원형, 제형(梯形), 방대형(方臺形)으로 다양한데 이 중 방대형의 고분이 3호분이다.
1996~98년까지 3단계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된 결과 영산강 유역 초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에 이 지역의 토착적인 묘제인 독(甕棺)이 매납되어 있어 영산강유역의 토착집단이 백제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의 거대한 분구(墳丘)에 독무덤(甕棺墓), 나무널무덤(木棺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돌덧널독무덤(石槨甕棺墓) 등 영산강유역에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묘제 41기가 확인되어 3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묘제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방대형분구을 조영하기 전에 만들어진 사다리꼴 모양의 선행분구(先行墳丘) 2∼3기를 확대조정(擴大調整)한 것을 밝힘으로써 이 지역 고분 축조의 특징과 함께 5세기 후엽에 이 지역 집단이 백제 등과 관련하여 어떻게 적응해왔는가를 살피는데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묘제(墓制)에 관한 내용 이외에도 금동신발, 은제관식(銀製冠飾), 장식대도(裝飾大刀)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영산강 유역-왜로 연결된 당시의 교류관계 및 역학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영산강유역에 대한 고고학, 역사학적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07. 나주 신촌리 9호분(사적)
영산강유역 중심세력의 거대고분
나주 신촌리 9호분은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옹관고분(甕棺古墳)으로 전남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위치한다. 반남면에는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일대에 고총고분군이 30여기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중심이 되는 신촌리 9호분만이 방대형(方臺形)의 분형이고, 그 외의 고분은 원형과 제형이다. 이미 신촌리 9호분은 80여년 전(1917∼1918)에 일본인에 의해 조사된 바 있으며, 당시 옹관(甕棺) 11기와 금동관모(국보), 금동신발, 고리큰칼(環頭大刀) 등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시대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의미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고 조사결과도 제대로 보고되지 않아 이후의 연구에 있어 장애가 되어왔다.
1999년에 실시된 재발굴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밝히는데 대단히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이라 할 수 있다. 분구(墳丘)의 정상과 중간 부분에서 서로 높이가 다른 원통형토기가 열(列)을 이루며 세워져 있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였는데, 광주 명화동(明花洞) · 월계동(月桂洞) 장고분(長鼓墳) 등 영산강유역 곳곳에서 원통형토기가 출토되었으나 분구 가운데에 열을 지어 확인된 것은 처음으로 이 토기의 부장위치 및 기능해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원통형토기는 일본 고분시대의 원통하니와(圓筒埴輪)와 유사한 것으로 장제적(葬制的)인 측면에서 관련이 있어 한 · 일간 고대사연구에도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으나, 일본열도의 ‘하니와(埴輪)'와는 기형, 제작기법, 정면수법 등이 상이한 점에 미루어 하니와에 대한 아이디어만을 차용하여 현지에서 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주구(周溝)는 분구 사방으로 돌고 있으나 웅덩이 모양으로 각 변에 2∼4 곳씩 파여 있는데 이는 분구를 높고 크게 하기 위해 주변에서 흙을 얻기 위한 기능적인 성격이 가장 중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옹관의 상하 중층 매납과 함께 분구 토층, 원형토기의 배치상태를 통해 분구는 한 번 이상 수직 확장된 것을 알 수 있어 이 지역 옹관고분의 축조특징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80여년 전에 시대적 한계를 안고 파헤쳐졌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나주신촌리9호분」의 발굴조사는 분구 축조방법, 매장시설의 구조, 원통형토기의 수립 등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영산강유역식의 원통형토기의 본격적인 도입과 백제의 문물 등 반남고분군 단계의 영산강유역 정치집단이 역동적인 시대 흐름속에서 적극적을 대처해 나간 흔적을 찾아내고 있는 점이 중요한 진전이다.
08. 서울 올림픽미술관 및 조각공원부지 발굴조사
조사지역인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88-2 · 3번지 일대 110,200㎡(약 33,400평)는 올림픽공원 내에 기존의 미술관 및 야외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던 곳으로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신축 미술관 및 지하주차장을 건립하고 조각공원을 새로이 정비하고자 사업을 진행한 곳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백제시대의 중요 토성으로서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호 중인 몽촌토성의 남단에 인접한 곳으로서 지표조사 결과 본격적인 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문화유산위원회 제3 · 6분과 합동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몽촌토성 외곽에 시설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해자(垓子) 등의 성벽 관련 구조물과 당시의 주거 또는 분묘 유적 등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사전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 결과 미술관 및 지하주차장 건립부지에서는 동편 구릉지대와 인접한 곳에서 일부 백제시대의 유물포함층 및 도랑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나 대체로 유물포함층의 두께가 두껍지 않고 출토유물의 양도 많지 않아 백제시대 당시의 집단적인 주거 시설 등은 조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서편의 저지대로 가면서 유물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두께 3m 이상의 뻘층이 확인됨으로써 이 일대는 몽촌토성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장기간에서 걸쳐 자연적으로 형성된 배후습지로 존재해 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정비 예정지인 야외 조각공원 부지는 지형상 서편의 대초원부지와 동편의 구릉지대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시굴트렌치 조사에서 올림픽공원 조성 당시의 지형을 짐작할 수 있는 토층 양상이 확인되었고, 일부 구간에서는 백제시대 유물포함층과 주거지 등의 유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북쪽의 몽촌토성 쪽을 제외한 삼면이 야트막한 구릉으로 오목하게 둘러싸여 있는 대초원부지는 동에서 서로 경사져 내려가는 지형으로서 올림픽공원을 조성하면서 2~3m 정도를 매립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으로 밝혀졌다. 특별히 동편의 구릉지와 인접한 비탈면에서는 백제시대의 방형 주거지 1기와 수혈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구릉지 안쪽의 저지대에서는 점점 지대가 낮아지며 서쪽으로 좁아드는 양상의 넓은 뻘층이 발견되었는데, 그 규모나 형태로 보아 몽촌토성 남쪽을 둘러싼 해자라기보다는 백제시대 당시 경작과 관련하여 상당량의 물을 가두었던 저수지 등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는 더욱이 몽촌토성의 성벽과 인접된 지점의 트렌치조사에서 해자로 추정할만한 단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데서도 뒷받침된다.
한편 동편의 구릉지대는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으로 다소 길게 분포되어 있는데 백제시대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시굴조사 결과 남북 방향 구릉은 대체로 원래 지형을 깍아 현재와 같이 조성한 반면 동서 방향 구릉의 동편 끝부분은 일부분을 인위적으로 성토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일대는 공원 조성시 이미 상당 부분을 훼손하여 백제시대 당시의 문화층이 대부분 멸실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남북 구릉의 남편 끝자락에 해당하는 계곡지대에서는 일부 백제시대 유물포함층이 확인되고, 소형 단경호를 비롯한 유물도 다량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이 일대는 당초 백제시대의 주거 시설 등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나 현재로서는 대부분 원형을 상실한 상태이다.
이상의 조사 성과를 종합해 보건대 올림픽미술관 및 조각공원 건립부지에서는 특별히 몽촌토성과 관련된 해자 또는 토성 외곽의 집단 주거시설 또는 분묘유적 등이 발견되지는 않으며, 구릉지로 둘러싸인 저지대는 오랜 기간 자연 배후습지 또는 경작과 관련된 저수지 등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09. 숭례문 발굴조사
숭례문 발굴조사는 2008년 2월 화마로 잃어버린 숭례문의 원형을 찾기 위해 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개년 계획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번 복구에서는 숭례문을 비롯하여 숭례문 좌우에 연결되었던 성곽, 그리고 주변의 원지형까지 조선시대 원형 그대로 복구할 계획으로 이에 대한 기초고증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연도별 조사 대상은 다음과 같다. 2008년에는 숭례문 내 · 외부 약 10여 미터 구간, 2009년에는 숭례문 좌측 성곽과 주변 지형 및 숭례문 육축 인접 지역, 2010년에는 그 밖의 지역을 조사할 예정이다.
조사결과 숭례문을 통과하던 조선 후기 도로와 건물터, 숭례문 좌우 성벽 기초 등이 확인되었다. 도로는 갈색 사질토를 6~8차례 켜켜이 쌓아 다진 후, 그 위에 비교적 큰 부정형의 박석(평균 110×100×10㎝)을 덮어 노면을 포장하는 매우 정교한 수법으로 쌓았다. 건물터는 조선 전기(16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건물터를 비롯, 조선후기~대한제국(19세기~20세기 초) 시기에 있었던 건물터까지 조선시대 전반을 아우르는 건물들의 흔적이 층층이 확인되었다. 그 밖에 배수 시설과 구들 시설이 확인되었다. 숭례문 좌우 성벽은 일제 강점기에 변형되어 현재와 같이 상단이 비스듬히 잘린 형태로 존치되어 있으나, 이번 조사로 하부의 성벽 기저부(기초부)가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지면에 노출되어 있던 작은 방형 석재(30~40×20㎝) 아래로 장대석석재 3~4단과 그 아래 할석과 황색 사질토를 번갈아 가며 약 210~240㎝ 높이로 쌓았다. 출토 유물은 조선시대 기와 및 전돌류, 백자향로 · 연적 · 타구 등 도기 · 자기류, 상평통보 · 숟가락 등 금속류, 그 밖에 벼루 등 다양하다.
10. 아차산4보루 발굴조사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과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산1번지 일원에 걸쳐 있는 아차산 4보루는 남북으로 뻗은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쪽 봉우리(해발 284m)에 있다. 아차산 4보루는 1997~1998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내부 조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 건물지 7기, 저수시설 2기, 온돌 시설 13기, 간이 대장간 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다량의 고구려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이후 구리시는 사적지 정비의 일환으로 기존 조사시 미흡했던 부분과 성벽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발굴을 우리 연구원에 의뢰하여, 2006년 5월부터 10월까지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치 4개소와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치(雉) 1개소, 배수로 1기, 온돌 시설 5기를 추가로 확인하였고, 특히 유적 남쪽에서 이중구조의 치를 확인하였다. 이 유구는 출입구 및 망루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아 앞으로 고구려 성곽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한다.
11. 아차산4보루 발굴조사
2005 ~ 2006년도 낙산사 원통보전에 대한 1차 발굴조사에 이어 2006년, 2차 발굴조사에서는 원통보전 주변지역을 조사하여, 건물지의 가람배치와 규모 등을 밝힐 수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낙산사의 가람은 모두 3단의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제1단에는 원통보전(법당), 제2단에는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지 2동, 그 남쪽에 동-서 방향의 건물지 1동이 있고, 그 아래 제3단에는 출입시설과 관련된 건물지 1동이 배치되는 구조로 밝혀졌다.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의 막새, 기와, 토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그렇지만 원통보전 주변 지역에서는 통일신라 ~ 고려시대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아 창건기부터 고려 및 조선후기 이전의 가람배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통보전 주변에 배치된 건물들은 조선후기 이후부터 화재와 중창을 거듭하면서 기단부 등을 계속 재사용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가람배치의 구조는 김홍도가 1778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 중의 하나인 '낙산사도'와 흡사하다. 이러한 낙산사 가람의 배치 양상은 18세기, 정선이나 김유성 등이 그린 각종 회화에서도 그 모습이 일부 확인된다. 낙산사 2차 발굴조사를 통해 고고학적으로 나타난 건물지의 모습과 18세기 그림 자료에서 보이는 모습이 거의 일치하는 사실이 밝혀진 데 의의가 있다. 또 이러한 그림 자료는 낙산사를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2. 장도 청해진(사적)
해상왕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하여 장도 청해진유적 발굴조사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해상왕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하여 사적으로 지정된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소재「장도 청해진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지금까지 밝혀낸 성과를 공개하였다.
그동안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는 장도 청해진유적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91년부터 모두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6차까지의 발굴조사에서는 판축토성(흙을 차례로 쌓아 다진 성곽) 으로 이루어진 890m에 달하는 성벽과 내부 건물지, 굴립주(땅에 나무기둥을 박아 세운 건물지) 건물지, 매납유구(땅속에 토기 등을 인위적으로 넣은 유구) 등을 확인한 바 있으며, 또한 331m에 달하는 해안 목책열의 분포범위 확인과 함께 총 3만여점이 넘는 많은 유물을 발굴하여 장도가 청해진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작년에 실시된 제7차 조사에서는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안 출입 겸 접안시설로 'ㄷ' 자형 석축 유구와 우물 등 중요 유구들을 발굴하여, 청해진의 본영(本營)이 바로 이 장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금년도(제8차)에는 섬 입구 해안지대에서 노출된 'ㄷ'자형 석축 유구와 우물의 구조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여 그 구조를 파악하였으며, 그 앞의 바다 밑에서 기왕에 알려진 목책 혹은 접안시설로 추정되는 나무기둥열과 나란히 또 하나의 목책열이 지나가고 있음을 새로이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성벽에 나 있는 배수구를 처음으로 발굴하였고, 청해진의 판축토성 성벽이 내외측 모두 2중 기단석을 깔고 조성한 것도 함께 밝혀냈다.
'ㄷ'자형 석축 유구는 21x22m 정도의 규모로서 내외측에 기단석렬을 깔거나 석심을 쌓고, 그 사이에 판축다짐을 하여 만든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물은 깊이 6m로서 바닥에는 통나무를 '井'자형으로 깔아 기초를 잡고, 그 위로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가 좁고(직경 150cm 내외) 중간이 약간 넓어지다가(직경 180cm 내외) 바닥은 다시 좁아지는 모양이다.
우물의 바닥에는 자갈을 약 50cm 두께로 깔아 물을 정화할 수 있게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우물바닥에서 사면편병, 주름무늬병 등의 토기류와 재갈편, 철제자귀, 금제고리 등의 금속제 유물, 그리고 어망추, 방추차, 숫돌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 출토된 편병류는 구연부만 파손된 채 4점이 나란히 깔려 있어 우물을 축조할 때에 의도적으로 묻어 놓은 것이 분명하며, 이는 우물의 축조 및 사용시기가 청해진 성의 축성 및 운용시기와 동일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깊이 6m의 이 우물은 청해진 뿐만 아니라 항해하는 장보고 선단의 주요 식수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도 서쪽 저지대에서는 성벽의 사이에 좌우 양쪽으로 석축을 하여 막감을 하고,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그 사이에는 잡석을 채워 물이 스며들게 하는 암거식 배수구가 조사되었는데 입구가 깔때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물이 잘 모여들게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판축토성의 배수방법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상과 같이 장도 청해진 유적에서 발굴된 수 많은 유구와 유물들은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기초자료가 될 것이며, 특히 절대연대가 9세기 전반인 많은 유물들은 앞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표지유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13. 중부 서해 도서지역 학술발굴조사
백령도와 연평도를 포함한 중부 서해 도서지역은 신석기시대 서해안 일대의 어로 및 해상활동을 규명할 수 있다고 인식되어 발굴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된 곳이다.
한편,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1982년 서울대학교에서 발간한 '백령 · 연평도의 즐문토기유적' 보고서와 2001년 '군사보호구역내 문화유적 지표조사' 내용에 대한 비교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인위적·자연적 요인에 의해 패총의 수가 16개소에서 9개소로 급감하였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패총도 파괴가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적보존대책을 수립하고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연평도에 남아 있는 패총 중 훼손 · 멸실의 가능성이 높은 유적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2000~2001년의 '소연평도패총', 2002년 '대연평도 모이도패총', 2003년의 '대연평도 까치산패총Ⅰ' 발굴조사가 그 결과물이다.
소연평도패총에서는 2개의 분리된 패각층을 확인하였다. 층위는 크게 7개 층이며, 이 중 2개 층이 신석기시대 패각층이다. 패각층은 부식토 바로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패각층 형성 이전의 구릉에는 생활면으로 추정되는 암갈색 점질토층과 암황색 사질토층이 퇴적되어 있는데, 이 두개의 층은 순패층 형성과 거의 시간차 없이 퇴적된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유물은 심발형토기, 호형토기, 완 등이 있다. 대부분 심발형토기이나, 상층으로 갈수록 점차 호형토기가 증가한다. 문양은 횡주어골문, 단사선문, 사선대문, 종주어골문, 격자문, 능문, 방점문 등이 있으며, 상층으로 갈수록 다양화·무문화되는 양상이다. 특히 제2패총에서는 제1패총과는 달리 새로운 기종과 문양이 출현하고 있어 제1패총보다 장기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1패총은 출토된 토기의 양에 비해 패각층 두께가 제2패총보다도 두꺼워 두 패총의 사용 용도가 달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적 내에서는 중서내륙지역과 남해안지역 관련 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양 지역간 문화적 상관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 아울러 300여점에 달하는 그물추와 생선뼈 저장용 대형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패각을 이용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서 제1패총은 B.C.2860~B.C.2280, 제2패총은 B.C.2860~B.C.2400(신뢰도 95%)의 절대연대가 산출되어 신석기시대 중기 말에서 후기 초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연평도 모이도패총에서는 직경 15m 내외, 최대두께 6m에 이르는 규모의 패각층이 확인되었다. 패각층의 단면 층위는 순차적인 퇴적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유구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와 야외노지 8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이미 퇴적된 패각을 파 낸 다음 가장자리에 벽석을 돌렸고, 내부에 위석식노지를 만든 정연한 구조이다.
유물은 중부 서해안에서 확인되는 침선문계 즐문토기가 다수를 차지하며, 황해도지역과 관련된 압날계 능문, 파상문 토기도 3점이 출토되었다. 다른 중부 서해안지역의 패총 유적보다 석기의 출토양이 많은 점이 특이하다. 아울러 패총 내에서 출토예가 많지 않은 석촉이 확인되었고, 한 개체분의 사슴뿔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어로와 함께 수렵도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연평도 까치산패총Ⅰ은 약 50여평을 발굴조사를 한 결과 크게 4개의 유물포함층이 퇴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구로는 주거지 1기, 야외노지 5기가 발견되었다. 토층상으로 볼 때 구릉상부에서 흘러내리면서 형성된 갈색마사점토층이 조사지역 전면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이 층을 경계로 층위간의 퇴적순서를 구분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즐문토기의 편년을 세분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압날계 단사선문과 능문, 파상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침선계 횡주어골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부 서해지역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이는 이 곳이 인접한 황해도 지역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며, 북한에서 출토된 즐문토기의 문양상과 상호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이와 함께 구분계토기 및 종주어골문의 존재, 태토에 활석과 석면이 혼입된 토기의 존재 등을 고려할 때, 이 유적이 중부 서해지역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유적들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패각 내부에서 노지와 함께 다량의 동물뼈 · 조류뼈 등이 일괄 출토되어 당시 생계양식에서 어로뿐만 아니라 수렵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되었다.
14.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금천교는 태종 11년(1411)에 건립된 것으로 궁궐 내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석교로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금천교는 진선문에서 약간 북으로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고적도보 등에 실려있는 사진과 동궐도를 비롯한 각종 문헌자료 등을 비교해 볼 때 금천교는 진선문과 직교하고 있는 것과 현재와 같이 비스듬하게 놓인 것의 두 종류 자료가 있어 오래전부터 일제시대에 이설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왔었다.
2001년과 2002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금천교 아래 두 개의 홍예 안에서 확인된 배수시설은 전체 길이 10m, 폭 2.4m이다. 금천교 남쪽 부근에서는 회색 뻘층 위에 세사립 점토를 30~40cm정도 깔아 다진 다음 지정 말목을 박아 그 위에 다시 잡석을 2~3단 놓는 방법으로 기초를 마련하였다.
출토유물로는 15~16세기의 청자와 백자편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19세기의 백자편과 왜사기도 일부 확인되었다.
15. 파주 금파리 구석기유적(사적)
전곡리와 더불어 한반도 구석인의 최대 거점 확인
금파리유적은 임진강 동쪽에 강방향과 나란하게 형성된 언덕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차에 걸쳐 조사하였으며, 주먹도끼, 원형 클리버, 다각면원구, 찍개, 석핵, 박편 등 총 2,400편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발견으로 임진강 하류역에도 제4기 지질시대에 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고인류의 환경적응체계 및 생활방식을 종합적으로 구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 서울 풍납통 토성(사적)
거대한 제국 백제의 실체 입증할 토성의 전모 드러나
서울 풍납통 토성(사적)은 1997~2000년 발굴결과 거대한 평지토성임이 밝혀짐에 따라 2003년부터 1차 10개년 중장기계획을 수립하여 사적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발굴하고 있다. 아울러 청소년문화체험마을 내 전시실을 마련하여 발굴자료 공개할 예정이다.
1999년 우리 연구원이 행한 성벽 발굴조사는 서울 풍납통 토성의 복원 및 정비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획득하고자 실시한 것으로 성벽에 대한 최초의 조사였다. 성벽 조사는 A,B 두 지점을 선정하여 각기 성 안쪽에서 바깥쪽까지 길이 50m, 폭 10m로 구획하여 동서로 완전히 관통시켜 성벽을 절개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서울 풍납통 토성은 중심토루를 중심으로 안팎에서 비스듬하게 판축토루를 덧붙여 나가는 방법으로 축조되었고, 성의 내벽과 외벽의 상부에 석렬을 쌓아 토루를 보강하였으며, 성벽 내부에 식물유기체를 섞어 쌓는 축조방법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지금까지 확인된 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축조방법으로 향후 고대 토성 축조 기법과 전파 과정, 아울러 토성 축조와 관련한 한성백제 초기의 왕성 또는 도성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17. 풍납동 197번지 발굴조사
백제왕도의 도성구조를 점차 밝혀내다
백제 초기 도성인 서울 풍납통 토성(사적)에 대한 제1차 10개년 학술조사 추진계획을 수립하여 풍납동 197번지 일대(舊 미래마을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지난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한성백제(B.C.18~A.D.475) 당시에 축조한 도로, 대형 폐기장, 건물지, 주거지, 수혈유구 등 543여기의 유구를 확인하였다. 특히 사질토와 강자갈을 다진 도로는 총 길이 123m와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배수시설이 시설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지역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확인되는데, 시기별로 평면 凸(呂)자형의 주거지 유형, 출입구시설이 부가된 평면 육각형인 중대형의 주거지 유형, 평면 방형 형태를 띠는 소형의 주거지 유형 순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凸(呂)자형의 주거지에서는 주로 경질무문토기와 낙랑계토기 등이 출토되며, 육각형주거지에서는 삼족기, 고배, 기대 등 한성백제 후기의 기종들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부뚜막의 경우에 凸(呂)자형의 주거지는 대체로 ㄱ자형 구들과 노지가 조성되어 있고, 육각형주거지는 연도부가 긴 一자형 부뚜막이 보이는데 반해 방형 주거지의 경우 짧은 연도부를 가진 八자형 형태 등을 보이고 있어, 주거지 유형간에 시기적, 위계적 차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사지역 북편일대에서는 주거지보다 장방형 수혈들이 다수 확인된다. 장방형 수혈들은 목곽으로 추정되는 토층상태나 대옹들이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창고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부여 관북리유적의 목곽창고와도 유사하다. 이는 음식물을 궁궐에 공급하기 위한 저장시설로써 사비기 목곽창고의 원류로 추정된다.
출토유물로는, 기존에 확인되었던 경질무문토기, 장란형토기, 기대, 고배 등 다양한 백제토기들 외에도 부여시대 노하심유적에서 출토된 금제이식과 유사한 은제이식 장식품, 중국제 포수, 청자음양각연판문완(靑磁陰陽刻蓮瓣文?), 중국 西晉代 시유도기, 중국 북위의 영향을 받은 연화문수막새가 출토되어 당시 백제 주변국과의 교류양상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확인되었다. 특히, 2005~2006년도에 대형 기와폐기수혈에서 막대한 수의 백제 한성기 기와가 출토된 이후 2010~2011년도에 건물지와 함께 수 천점에 이르는 백제 한성기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는 한반도 초기 기와연구에 더없이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조사지역 동남편에는 서울 풍납통 토성 내에서 최초로 지상식 건물지 4동이 발견되었다. 이들 건물지는 평면 장방형의 지상건물과 呂자형 지상건물, 그리고 평면 장방형이면서 기단석을 갖춘 지상건물로 구분된다. 평면 장방형의 지상건물은 강자갈과 점토 등을 채워 넣은 적심시설이 확인되었다. 呂자형 지상건물은 비록 명확한 내부시설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존의 수혈주거지 외에 성토된 지상건물로는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한 기단석을 갖춘 지상건물은 기단석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채운 적심토시설 내 바닥에서 초석과 기둥흔이 확인되었다. 이는 이제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새로운 건물 축조양상이다. 이러한 건물지는 관청 내지 종교와 관련된 시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향후 왕성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18. 풍납동 410번지 발굴조사
백제시대 목제우물 발견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410번지 외 15필지이며 서울 풍납통 토성 동벽(문화유산지정구역)에서 남쪽으로 약 15~20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아파트재건축부지로 면적은 약 5,696㎡이며 우리 연구원이 2004년 7월 26일부터 9월 25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지역 역시 서울 풍납통 토성 동벽에 인접한 외곽지역으로 해자의 존재여부와 백제유물포함층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너비 12~14m, 길이 24~45m의 조사갱 3개를 설치하여, 지표에서 약 7.4m까지 굴토한 결과, 지표하 약 2m까지는 매립토층이고 그 아래에서 백제토기 조각이 출토되기는 하나 유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지역 동북편인 336-1번지 일대에도 아파트재건축을 위한 발굴을 2004년 3월 25일부터 5월 11일까지 실시하여 백제시대 배수로, 수혈 등 총 5기의 유구를 확인하였다. 배수로는 단면이 'U'자형이며, 길이 112cm, 너비 50cm, 최대깊이 45cm이다. 입수부는 남쪽이고 입수부와 북쪽 끝부분 바닥면의 높이 차이는 37cm이다. 입수부와 중간 일부에는 암거시설이 되어 있으며, 상부와 내부에서 대옹편과 연질뚜껑이 출토되었다. 수혈유구는 장방형 혹은 부정형의 구조로, 내부에서는 각종의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19. 서울 풍납통 토성 주거지
아파트 숲속의 지하에 한성 백제 초기의 왕성 숨쉬고 있어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 풍납통 토성은 한강변 충적대지에 위치한 평지토성으로 총 둘레가 3.5km에 달하며 평면 육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1997년 토성 내부 아파트 건축현장에서 다량의 백제 토기 조각이 출토되어 우리 연구원이 긴급 발굴조사를 하였다.
조사결과 수혈주거지 19기, 수십 기의 저장용 및 폐기용 수혈, 토기가 흩어져 있는 유구, 토기가마 등과 이들 유구보다 이른 시기의 3중 환호유구등이 확인되었다.
이는 그동안 알려진 한성백제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상태가 양호하고 규모나 출토유물 면에서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울 풍납통 토성 내 주거지는 평면형태 6각형에 전면부 단벽에 돌출된 출입시설, 점토와 판석 등을 이용한 부뚜막 시설 등을 특징으로 하여 당시 주거지의 구조와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류 외에 기와류, 전돌류, 철기류, 어망추, 방추차, 토관 등 1,200여 점이 출토되어 한성백제시대의 문화상을 다각도로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 한 · 러 공동발굴조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러시아 극동지역 소재 한민족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2000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이 조사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아무르강 하류 수추섬유적(2000~2002년), 연해주 불로치까유적(2003~2005년)을 발굴하였다. 수추섬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로 편년되는 주거지 5기와 석기제작장 2기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평저토기를 포함하여 돌날, 몸돌 등 다양한 석기가 출토되었다. 발굴된 주거지와 유물은 아무르강 하류의 신석기문화 연구 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북지방,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동북아시아의 평저토기문화권의 시원, 편년, 변천과정의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불로치까유적은 두만강 하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취락 유적으로, 이번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3기, 초기철기시대 주거지 20기가 조사되었다. 특히 초기철기시대 크로우노브카 문화기로 편년되는 주거지와 유물은 무산 호곡동, 회령 오동, 나진 초도 등 두만강 유역을 비롯하여 중국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고고문화를 "옥저" 또는 "북옥저"에 비정하고, 이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춘천 신매리, 강릉 교항리 등 강원도에서도 불로치까 출토 토기와 유사한 토기군이 출토되고 있어 연해주와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성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초기철기시대 폴체문화로 편년되는 주거지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온돌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는 온돌과 평면형태나 구조면에서 동일한 것으로, 온돌의 계통, 구조,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아무르 강 중류지역의 말갈발해 시기의 유적을 러시아와 공동발굴하였다. 2007년 조사한 트로이츠코예 유적에서는 말갈발해 고분 18기를 조사하여 8~9세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서아무르지역으로 속말말갈인들의 이동과 그들의 매장구조 및 장법을 이해하는 중요 자료를 확보하였다. 2008년과 2009년은 서아무르지역 말갈발해 시기 취락인 돌고예오제로 유적과 오시노보예오제로 유적을 발굴하여 서아무르지역 고고문화의 실체에 접근하였다.
2006년부터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학고고학민속학연구소와 연해주 소재 한민족 관련 유적에 대한 분포현황조사와 발굴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추구옙카 지구 콕샤롭카 유적을 발굴하여 발해 시기 연해주 중남부의 중세문화를 규명하였다. 콕샤롭카 유적은 발해 중흥기 영토 확장의 실증자료를 제공하며, 고구려 문화의 계승과 말갈을 비롯한 주변 민족을 복속하고 운영한 지방행정체계 규명 등 발해사연구에 중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