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자연환경과 역사

지리적 입지와 자연환경

경주는 경상북도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천년의 고도로서 동북쪽으로는 포항시, 남쪽으로는 울산광역시 북구, 북쪽으로는 영천시, 서북쪽으로는 청도군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주시의 면적은 1,324.41㎢로서 전국 시 · 군(광역시 포함. 1999년 기준) 단위 중에서 홍천군(1,817.85㎢), 인제군(1,621.20㎢), 안동시(1,519.18㎢), 평창군 (1,463.46㎢)에 이어 다섯 번째로 넓은 면적이다. 이 가운데 전체 면적의 2.6%인 34.66㎢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적보존지구는 전체 면적의 약 0.9%인 12.25㎢에 달한다.

대부분 경상분지지체(慶尙盆地地體)에 속하고, 일부지역(양북면 어일리 · 범곡리, 천북면)은 포항분지지체에 속한다. 경상분지 지역은 경상계(系)의 퇴적암층을 뚫고 관입한 불국사관입암층(佛國寺貫入岩層)으로, 화강암과 반암이 주로 분포한다. 포항분지는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지층으로 화성암 · 수성암 · 역암 · 사암 · 응회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해안지역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여 하천이 짧고, 남부지역인 외동에는 울산만으로 흘러가는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이 남으로 흐르며, 단석산계 서편인 산내지역은 산악이 중첩하고 낙동강의 지류인 동창천이 흐르고 있다. 명활산(明活山, 245m) · 금오산(金鰲山, 495m) · 옥녀봉(玉女峰, 214m) · 선도산(仙挑山, 381m) · 금강산(金剛山, 143m) 등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는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시가지의 서쪽에는 형산강의 상류인 인천(麟川)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 경계를 이루는 서천, 중심부를 관통하는 남천과 합류하여 형산강 본류가 형성되어 영일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기후는 서부지역이 한서의 차가 심한 편이고 동부지역은 동대산계와 동해의 영향으로 다소 따뜻한 편이며, 기온교차가 비교적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5도, 강우량은 1,157mm로 여름에는 태풍이 3~4회 내습하고 있다.

연혁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고 한다. 이 나라가 503년(지증왕 4, 혹은 307년 기림이사금 10년이라고도 함)부터 신라로 개칭 · 발전하였는데, 건국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연혁 목록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 4. 1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 (1읍 12면)
1937. 7. 1 양북면 감포리 외 8개리 분리 감포읍으로 승격 (2읍 11면)
1949. 5. 20 강서면이 안강읍으로 승격 (3읍 10면)
1955. 9. 1 경주읍이 시로 승격, 군명칭을 월성군으로 개칭
1973. 7. 1 서면의 건천리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
1980. 12 외동면이 외동읍으로 승격
1989. 1. 1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환원개칭
1995. 1. 1 통합 경주시 출범 (4읍 8면 17동)
1998. 11. 14 행정동 통폐합 (4읍 8면 13동)
2009. 1. 1 행정동 통폐합 (4읍 8면 11동)

행정구역과 인구

현재 경주시의 행정구역은 11동(동천 · 보덕 · 불국 · 선도 · 성건 · 용강 · 월성 · 중부 · 황남 · 황성 · 황오), 4읍(감포 · 건천 · 안강 · 외동), 8면(강동 · 내남 · 산내 · 서 · 양남 · 양북 · 천북 · 현곡)이며 822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동향을 살펴보면 1999년 말을 기준으로 96,664세대에 292,480명이며 세대당 구성원은 3.1명이다. 남녀의 구성비는 비슷하며(남:145,219, 여:146,395) 최근 5년간의 인구증감의 차이는 거의 없으나 고령인구의 증가가 두드러지고 있다.

경주의 문화

신라는 낙동강 동편의 경상남북도 곳곳에 위치하고 있던 진한(辰韓) 12국 중 경주지역의 사로(斯盧) 부족이 점차 주변 소국을 아우르며 왕권국가로 발전한 나라이다.

사로 부족이 국가의 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시기는 기원전 1세기 후반경으로 이 시기에 조영되기 시작한 경주 조양동 무덤에서는 한(漢)나라의 거울을 비롯해서 각종의 철제무기가 출토되어 당시 중국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철제무기의 힘을 바탕으로 서기 2세기 북으로 흥해(興海), 서로 영천(永川), 남으로 울산(蔚山)까지의 땅을 차지하였고 3세기 중반에는 다시 땅을 넓혀 북의 울진(蔚珍), 서의 상주(尙州) · 개령(開寧)에 이르는 낙동강 동안(東岸)까지 점령하였다.

4세기에 들어서 내물마립간(柰勿痲立干)이 재위하던 기간(356∼402년)은 안으로는 김씨 세습체제가 확립되고 밖으로는 정복 사업을 펼쳐 신라가 낙동강 동쪽의 경북일대를 지배하는 왕권국가가 되는 시기로서 이때 비로소 중국의 사서(史書)에 「신라(新羅)」라는 나라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는 왕권국가로의 기틀을 다지는 마립간시기에 경주와 그 주변에 거대한 봉토를 갖춘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신라는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 복속의 정도가 미약하여 독자적으로 하나의 영역국가를 다스려 나갈 힘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치 · 군사적인 면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이 국위를 떨치고 있던 고구려와 국교를 맺고 화친정책(和親政策)을 썼으며 고구려의 알선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5세기 초에는 침입한 왜구를 몰아내는데 고구려의 군사적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신라가 왕권국가로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게 되는 것은 지증왕(智證王)과 법흥왕(法興王) 때에 이르러서이다. 지증왕(500∼514년) 때에는 마립간(麻立干)대신에 중국식 왕호(王號)를 사용하여 왕위세습 및 정치체제를 확립하였고 한편으로는 우산국(雨傘國)을 정복하여 대외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514∼540년)은 율령을 공포하고(520년) 불교를 공인하였으며(527년),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536년) 왕권의 전제화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의 발돋움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었고 대가야국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회유하였으며 532년에는 본가야[金官伽倻]를 병합하여 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진흥왕(540∼576년) 때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지역을 점령하고 대가야(大加耶)를 끝으로 가야를 모두 합병하였다(562년). 뿐만 아니라 동북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마운령(摩雲嶺)까지 진출하여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이룩된 신라의 발전모습은 울진의 봉평신라비(鳳坪新羅碑)를 비롯하여 단양 적성비(赤城碑),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세워진 순수비(巡狩碑)에 잘 나타나 있다. 한강유역의 확보는 중국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으며 가야국의 정벌은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함으로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기틀이 된다.

신라의 이러한 대내외의 발전과 무열왕(武烈王) 김춘추의 탁월한 외교수단에 의해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년) 백제를, 668년(문무왕 8년) 고구려를 함락하여 반도를 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당은 신라를 그들의 지휘하에 두려고 각지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신라의 기대와는 상반되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신라와 당 사이에는 전투가 벌어졌고 이를 승리로 이끈 신라는 676년(문무왕 16년)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을 차지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비로소 한민족만으로 이루어진 통일된 국가체제를 마련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넓어진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전제왕권(專制王權)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지방을 9주(九州)로 나누고 다시 5소경(五小京)을 별도로 두어 중앙귀족을 관리로 파견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신라의 귀족 · 불교문화는 지방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통일신라 문화의 기틀은 삼국통일 직전의 7세기부터 다져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의 문화적 변화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대신하여 돌방무덤(석실)이 왕을 비롯한 귀족층까지 적극 수용되었고, 토기에 있어서도 굽다리가 낮고 굽구멍이 형식화되는 한편 도장무늬(花文)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는 이후 혜공왕(惠恭王) 4년(768년) 대공(大恭)의 난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기에 접어들기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로서 문화상으로도 발전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통일 이전 도성 안에 흥륜사 · 황룡사 · 분황사 등의 사찰을 지었고 곧 불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문화내용에서도 불교적인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통일 이후 100여 년 동안에는 불교미술의 정수로 이야기되는 불국사(佛國寺)가 창건되고 안압지(雁鴨池)와 석굴암(石窟庵)이 조영되며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해서 범종(梵鐘) · 석등(石燈) · 석부도(石浮屠) · 석조(石槽) ·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에 있어서도 우수한 것이 많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조각솜씨와 금속공예품에 남아 있는 세공솜씨는 통일신라의 미술이 우리나라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우수했던 것으로 평가받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와 같이 불교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던 통일신라의 문화는 잦은 왕위 쟁탈전과 지방 호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8세기 말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귀족들의 내부 분열과,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상류계급이 될 수 없었던 6두품(六頭品)세력의 불만이 커졌다. 그리고 경주 귀족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지탱하기 위한 세금의 지나친 수탈에 따른 농민의 반란 등은 결국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에 대한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을 야기시켜 완산주(完山州, 全州)에서는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 892년)를, 송악(松岳, 開城)에서는 궁예(弓裔)가 후고구려(後高句麗, 901년)를 건국하여 다시 통일 이전의 양상과 같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후삼국은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高麗)를 새로이 건국한(918년) 왕건(王建)이 935년에는 신라를, 936년에는 후백제를 병합하여 천년에 걸쳐 영화를 누렸던 신라문화도 함께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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